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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가는 길: 깨어있음을 읽고

나는 ‘모태 불자‘다.

대대로 불교를 믿어 온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듯 천수경, 반야심경을 부르며 자랐다.

익숙함 때문일까?

내게 불교는 신을 섬기는 종교라기 보다 삶이고 일상이다.

부처님은 내게 큰 스승님이고,

불경의 말씀들은 살아갈 철학이자,

삶의 굴곡진 골목을 밝힐 등불이다.

자라면서 ‘종교‘가 나를 옥죄거나, 겁주거나,

나를 규정 짓고 다그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9살 때 친구가 과자 받으러 가자며

나를 교회로 데려 갔다.

마침 부흥회였는데

그곳의 열기와 열정이 너무 뜨거워서 마음을 크게 데었다.

지옥가기 싫으면 앞으로 친구와 꼭 교회에 나오라던

친절한 목소리의 교회 선생님도 너무 무서웠다.

내가 지옥에 간다고? 내가 왜? 엄마 말씀도 잘 듣고,

학교에 폐품도 잘 내고, 선생님 말씀도 잘들어서

칭찬도 많이 받는데, 내가 왜 지옥에 가지? 교회를 안 다녀서?

나는 고작 9살이었지만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구분하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말했던 그 입으로,

교회에 안 나오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선생님이 이해가 안갔다.

그리고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그 교회 앞을 지나지 않으려고 멀리 돌아서 다녔다.

나를 교회에 데려 갔던 친구는

다음 주에도 교회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싫다고 했고,

그 아이 엄마는 나랑 놀지 말라고 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나의 ‘타종교‘에 대한 첫경험이다.

나는 개신교가 소란스럽고 강압적인 면이 있어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나랑은 별로 상관없는,

다른 세상의 일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살았다.

안 맞는 사람들과 자비를 나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내게 ‘어머, 젊은 분이 왜 절에 다니세요?‘ 하며

나를 변화시키고 교화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며

사랑을 나눠주지 않는 것처럼.

그러던 중 위대한 스승님, 바로 틱낫한 스님의 책들을 만났다.

사실, 그 분의 저서에서 구분의 불필요함을 읽고,

경계없음을 배웠으면서도 마음에서는 계속 구분 짓고 있었다.

지난 21일,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서야

내가 눈으로만 스님의 글과 지식을 쫓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것을 갑자기 깨달은 것은 아니고

우연하게도 스님이 열반하시기 얼마 전부터

불광출판사의 ‘깨어있음‘이라는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님의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

깨달음에 도움을 주었다.

‘깨어있음‘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신부님께서

틱낫한스님과 에크하르트 신부님의 마음챙김 명상,

관상 기도를 통한 가르침을 쓴 책이다.

이 책에서 종교를 초월한 틱낫한 스님의 넉넉한 마음품과

브라이언 신부님의 깊은 정신 세계와

신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느꼈다.

이웃 종교들이 성스러운 주고받음에 함께 투신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서로를 하나로 엮어주는 음악을 발견하고

영성의 풍요로움을 나누면서

세계의 분쟁을 해소할 날을 꿈 꿀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교가 태이(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에서배울 점은 많다.

그리스도교 전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십계명의 압도적인 힘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자유롭고 중립적이며

실천적인 영성에 대한 가르침은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경향이 있다.

영성생활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이 순간을 위해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브라이언 신부님이

그리스도교 지식으로 바라 본 마음챙김은

내가 알던 그것과 결이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매일 보던 친구의 뒷모습을 처음 본 것 같은

새로움을 느꼈고,

그 새로움이 내가 머리로만 아는 것과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 사이의 괴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지금, 여기, 관찰하고 마음을 다해서 집중하라는

막연한 불교의 주문이,

브라이언 신부님을 거치며

실천 영성, 영성 생활이라는 손에 잡히는 ‘개념‘ 이 되었다.

보편적으로 ‘종교‘에서는 신에게 무엇을 소망하고,

기원하는 기도를 드린다.

신을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 영성‘이

‘종교‘가 되는 과정을 생각해봤다.

‘종교‘에서 기도는 ‘미래‘를 기원하고 소망하는 도구다.

기도는 미래의 구원을 담보로 한다.

담보 잡힌 자는 의무를 지닌다. 의무를 그를 구속한다.

그 구속은 내가 섬기는 신에 대한 규율을 쌓아올리고,

경계를 완고히 한다.

하늘에 속해 있던 구름같이 아름답던 종교는 딱딱해지고

그 무게에 못이겨 인간의 땅으로 내려와 인간의 도구가 된다.

(중세시대에 있었던 면죄부가 좋을 예가 될 것 같다. )

인간의 도구인 종교라면 구분 짓는 것이 각자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신에 대한 사랑,

삶 속에서의 실천이라면 종교간 경계는 사라진다.

무엇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느끼고, 알고 감사하며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신을 사랑하는 길이고,

그렇다면 그 신이 어떤 이름,

어떤 모습이어도 달라질 것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깨어있음이라는 책과,

틱낫한 스님의 열반 사이에서 이 깨달음이 내게 찾아왔고,

나는 모처럼 가벼운 마음, 보드라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제 이 고마운 책을 덮으며 나는 ‘태극‘을 생각한다.

태극의 기본 원리는 ‘다름의 만남‘이다.

음, 또는 양만 있는 상태는 그저 ‘있는‘ 상태지만

두 성질이 만나 역동하고, 그 움직임이 변화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태극의 아름다움은, 다른 두 개가 만나

‘무한의 새로움‘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브라이언 신부님도

틱낫한 스님과 에크하르트 신부님을 통해

영성의 태극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브라이언 신부님의 태극은 어떤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까?

이웃 종교(이 단어가 참 정겹다. 타종교가 아니라 이웃 종교.. 부침개 들고 당장 찾아가고 싶어지는 말이다.)와 만나고 화합하는 일은 우리 생각보다 더 강력하고 선한 힘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나도 나만의 태극으로,

켄 윌버의 무경계처럼,

경계를 벗어나,

틱낫한 스님이 돌아간 그 태초의 고향으로

삶 속에서 드나들고 싶다.

고향으로 가는 길, 어렵게 한 걸음 떼어 본다.

-충만한 삶은 지금 우리에게 열려 있다.

마음을 다해 일상의 매 순간을 온전히 산다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우리의 고향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오직 지금 여기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가만히 멈춰 서라.

숲은 그대가 어디 있는디 알고 있다.

숲이 그대를 찾게 하라.

데이비드 워거너: 길을 잃은.

**틱낫한 스님, 고향에서 평안하세요🙏🏻🙏🏻 마야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