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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를 읽고

“나도 그랬는데….”
이 책을 읽으며 수없이 중얼거리던 말이다. 
70년대 끝자락에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태어난 나. 
나의 엄마 시절보다는 자유로워 졌다지만 
여자이기에 때문에 
고개 숙이고 참아야 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어른들의 ‘조언'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났던 밤들,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텐데 아깝다며 ‘칭찬’받던 순간들, 
너희는 대통령이 아니라 
영부인을 꿈꾸는 거라던 여자 선생님들,
엄마를 사랑하지만 
나를’여자애’ 로 만들려는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던 
어린 날들…
나도 있었는데…
나도 그랬는데….
나의 불쾌했던 순간들이 
서구 문명의 80년대에 태어난 작가에게서도 발견될 때
작가의 유쾌한 필체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쾌할 수만은 없었다. 
다른 공간, 다른 문화, 다른 세대에서도 
아직 이런 것들이 남아있다니 안타까웠다. 

내가 여자라서 겪는 것이 틀림없었던 
도무지 말도 안되는 오만가지 일들을 기억한다. 
p.14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분노와 불편을 감내하는 것이 
여성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p.44

260여 페이지로 짧은 분량인데도 
읽는데  2주가 걸린 이유는 
책에서 소개된 책들을 찾아보며 
작가인 ‘그녀들’과 함께 읽었기 때문이다. 
카르멘의 리드에 따라 
다시 한 번 ‘언니들’의 목소리를 듣고 끄덕이며 
지금의 나와, 어제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를 생각했다. 
어제의 나는 
나의 엄마가 내게 ‘전수’하려던  
'여자의 미덕’을 온 힘을 다해 거부했다. 
오늘의 나는 
40대 일하는 여성이자 공부하는 엄마로,
내 아이들에게 너무 흔해서 잘 보이는 않는 
온갖 불평등을 바로볼 수 있는 
눈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으로 내일의 나는, 
내 아이들이 흐림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조화로움을 가치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록산 게이가 말하는 이 본질주의적 페미니즘은 
격렬한 분노, 유머의 결여, 호전성, 의심의 여지가 없는 
원칙을 상기시키며 
페미니스트 여성이라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련의 규칙들을 지시한다. 
‘포르노그래피를 증오하고, 
남자들을 증오하고, 섹스를 증오하고, 
일에만 집중하고, 제모를 해서는 안 됨.’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잘못하고 있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록산 게이는 핑크색과 랩을 좋아하고 
나는 원피스를 입고 립스틱과 
매니큐어 바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록산 게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많았다. 
누군가 나를 페미니스트라 호명할 때 
단어 뒤에 숨은 뜻, 
이를테면 ‘너는 화가 나있고 섹스를 혐오하고 
남자들을 증오하잖아.’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강하게 부정했다. 
록산 게이의 글을 읽으며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했다. 
pp.160~161

나도 록산게이의 글과 생각에 동의한다. 
나는 온갖 반짝이는 악세사리와 향수,
남자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고, 
누구보다 섹시하게 춤출 줄도 알며,
나의 반려, 내 남편을 마음 깊이 사랑한다.
그렇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나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가 싸움, 저항, 쟁취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시작되었지만 
그 끝은 '조화로움’이어야 한다. 
차별을 바로 보고 
그 안에서 고통받는 약자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
일부가 가졌던 이권과 기회가 고르게 주어지는 것, 
그로써 
모두가 가지고 태어난 대로의 아름다움을 지키며
살아 갈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가치다. 

페미니즘의 ‘옳음’이 아닌 
‘좋음’을 함께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튕겨져 나오는 말이 아니라 
스며드는 말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작가 은유, 경향 신문 인터뷰 중에서-
  *이 문장이 좋아서 메모앱에 저정하고 다닌다. 

이 책의 작가와 나는 
“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야, 네가 페미니스트가 되어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 은유의 말처럼 '스며드는 말'이 필요하다. 
더 많은 스며드는 말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기를!!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진다. 
-윈스턴- 
p.107